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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뒤

자기 앞의 생

by 미녕 1ofyoung 2020. 5. 18.


속이 꽤 시끄럽던 어떤 날,

혹 이 소란을 잠재워줄 방안이 있을까 기대하며 정신과 의사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들었다.

마음의 문제였던 거다.

실낱같은 기대와는 달리 또렷한 해법은 없었지만

같은 시간을 살며, 모두 참 다른 모습과 생각으로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처럼 머리와 속에 소음이 가득한 사람들의 사례가 소개되었고,

의사는 제한된 조건이라 조심스레 진단하고, 나름의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몇 편의 방송을 찾아 듣는 행위가 위안을 주지는 못했지만, 고민의 무게는 줄여주었다.

세상엔 참 고민거리가 많아, 내 품의 고민이 가장 큰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방송에서 의사가 책을 한 권 추천한다.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 곧 그의 삶부터 소개된다.

 

로맹 가리. 그는 첫 소설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이후로도 탄탄한 행보를 보인 작가다. 하나, 어느 시점에 와서는 예전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이에 필명을 에밀 아자르로 바꿔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에밀 아자르가 되자 다시금 그의 작품이 극찬을 받게 됐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자살하며 본인이 에밀 아자르였다는걸 고백한다.

 

작가의 이야기가 책을 선택하게 했다.

의사는 작가 소개 후 책의 내용도 설명했지만, 열심히 듣지 않았는지 기억이 없다.

범상치 않은 인생을 살았던 작가의 글이 궁금해졌다.

 

/

 

「자기 앞의 생」은 아이의 목소리로 전개된다.

주인공 모모는 아랍인으로,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과거 매춘부로 일했던 유태인 로자 아줌마의 집에서 자란다.

 

책은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삶을 버텨내는 길지 않은 시간을 담고 있다.

그들 주변의 사람들, 그들 또한 기반이 단단하지 않아 힘겹고 아슬한 생을 살아가지만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하루를 넘긴다.

 

그중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유대가 가장 애틋하다.

로자는 젊은 날,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군에게 끌려간 뒤 평생 끔찍한 기억에 시달린다.

나이가 들어서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병까지 얻는다.

열 살의 모모는 곁에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모모의 삶엔 턱이 많다.

제법 날쌔고 똑똑한 녀석이라 걸려 넘어지진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지나가기도 힘들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는 아이라, 고달픔이 배로 전해진다.

아이는 영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삶에 대해 뱉어놓은 아이의 말이 꾸밈없어 더욱 와 닿는다.

책을 보며 줄을 긋거나 메모하는 일을 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 책에는 붙은 메모장이 꼭 13장이다.

모모가 들려주는 삶의 정의가 보석 같다.

책을 읽으며 하나씩 발견해 나가는 기쁨이 꽤 크다.

 

아이의 목소리라 슬픈 작품이 있다.

그들은 꾸밈없고 체면을 차리지 않아, 내뱉는 말이 망설임 없이 달려와 가슴을 파고든다.

자고로 아이는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생명체라,

아이가 겪는 고통이 성인에게 다가올 때와 그 양이 같다 해도 더욱 서글픈 법이다.

고난을 극복하는 방식은 어떤가. 어른들만큼 선택지가 많지 않다.

능수능란하지 않아 속상하고, 서툴러 애달프다.

 

책이 끝나도록 모모의 덤덤한 목소리는 바뀌지 않았지만

결국, 마지막 장에선 눈물이 났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방에 머물렀다.

쉽게 오르내릴 수 없는 로자 아줌마의 침대 한쪽에 앉아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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