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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뒤

파과

by 미녕 1ofyoung 2020. 5. 20.

 

 

암살자, 여성, 노인.

어떤 의도로든 쉽게 엮일 단어가 아니다.

 

「파과」는 킬러이자 여성이며, 60이 넘은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설정부터 흥미로워, 주인공이 어찌 이야기를 끌어갈까 궁금증을 더한다.

 

주인공 조각은 방역 회사에 속해, 이유 불문 조직에서 지정해 주는 대상을 암살한다. 그 세계 용어로 ‘방역’, 누군가를 죽여 없앰을 일컫는다. 타고난 실력으로 40년간 완벽히 일을 마무리하던 그녀도 60대 중반에 들고서는 본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인정하고 무리 않는 선의 의뢰를 골라 처리하며, 다가올 은퇴를 어렴풋이 그리는 하루를 산다. 초반부 그녀의 노화에 대한 언급이 길어질수록, 혹 「살인자의 기억법」마냥 나이 듦과 감퇴하는 기억력으로 인해 본업인 방역에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는 내용이 아닐까 쉽게 추측했었다. 하나, 아슬하지만 조각은 예상외로 일을 잘 처리했고, 그녀의 킬러 생활은 무탈하게 끝을 향해가나 싶었다.

 

주인공은 그려볼 법한 암살자의 삶을 살고 있다. 본명을 쓰지 않고, 가족과 딸린 살림도 많지 않으며, 쓸데없는 감정도 만만히 품지 않는다. 항상 날이 선 채 관찰하며, 서둘러 분위기를 읽어 냉철하게 결론 짓는다. 늘 긴장할 수밖에 없는 킬러의 삶이라, 펼쳐진 문장 또한 글자마다 적확하고, 몹시도 간결하며, 긴장으로 뭉쳐져 짐짓 기대었다간 세게 튕겨 나올 만큼 빈틈이 없다.

 

아무것도 없을 듯한 그녀의 삶에 자꾸만 누군가 등장한다. 일로 엮인 건조한 관계를 제외하고, 과거에서부터 곁을 맴돌던 하나의 존재는 마지막까지 그녀 삶에 이름을 내비친다. 그녀가 왜 킬러가 되었는지 예측해보겠는가? 책은 친절하게도 조각의 과거사를 허심탄회하게 털어준다. 하나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기가 막히도록 선천적인 기량을 갖고 있던 그녀. 차라리 평탄치 않던 삶에 분개해 남의 명줄을 쥐고 흔드는 킬러가 되어 우월감을 맛보고자 그리되었다는 설정은 어땠을까. 한편의 연정이 그녀를 암살자로 살게 했다는 사실이, 당당한 여성 킬러의 모습을 기대하던 나에게 아쉬움을 남긴다.

 

읽는 이의 눈을 당기는 문장력은 기가 막힌다. 쉽게 온점을 맺지 않는 의식의 흐름과 까다롭게 고른 어휘가 기분 좋은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책을 완독하기까지 분명한 단어 뜻을 알지 못해 몇 번이나 사전을 뒤적거렸다. 실제 만나기 힘든 암살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재미만큼, 알지 못해 사용할 수 없었던 낱말을 만나는 재미도 대단하다. 물론, 부족한 나에게만 해당하는 경우다.

 

조각의 마지막 격투 장면에서 작가를 만났다. 그동안 내비쳤던 몇 번의 암살 장면과 비교해 단번에 끝나지도, 쉽게 마무리 지어지지도 않던 그 장면을 보며 책의 작가가 떠올랐던 건 왜일까? 조각은 전체를 바라보며 상황을 재빠르게 판단한다. 서둘러 예측해 필요한 것들을 철저히 준비하고,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필요한 지점에 칼날을 내다 꽂는다. 작가가 그리하고 있다. 틈 없이 완벽한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반드시 요구되는 자리마다 확실한 말들을 내리꽂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휘두르는 조각의 칼날처럼, 작가는 수천 개의 글을 조합해 가상의 세상을 휘젓고 다닌다. 글을 읽는 내내 작가도 조각처럼 일 처리가 깔끔한 사람이 아닐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65세. 그리 늙은 나이는 아니지만 민첩함과 명확함을 최우선으로 하는 킬러의 삶에서만은 노인이 분명하다. 평생을 버텨왔던 생업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기에 조각은 변했을까? 40년간 곁을 지키던 그리움과 사모하는 마음이 끝까지 그녀를 물고 놓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절대 쉽지 않았던 암살자의 삶이 오롯이 본인이 선택한 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을 덮자 꽤 많은 물음표가 눈앞에 던져진다.

 

책을 폄과 동시에 떠올랐던 질문이 있다. 정말 킬러라는 직업이 있을까?

저물어가는 암살자의 삶이 궁금하다면 「파과」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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